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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鲜王朝实录 117 木浦의 地名 由來에 對한 小考 1. 글 머리에 2. 地名이란 어떤 것인가 3. 옛 文獻에 나타난 木浦의 地名과 그 由來 ㄱ) 朝鮮王朝實錄에 나타난 木浦 ㄴ)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타난 木浦 4. 木浦府史 속의 木浦의 地名 由來 ㄱ) 樹木 운운한 것에 대하여 ㄴ) 木花 운운한 것에 대하여 ㄷ) 地形 운운한 것에 대하여 ㄹ) 地名 移動 운운한 것에 대하여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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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木浦의 地名 由來에 對한 小考 1. 글 머리에 2. 地名이란 어떤 것인가 3. 옛 文獻에 나타난 木浦의 地名과 그 由來 ㄱ) 朝鮮王朝實錄에 나타난 木浦 ㄴ)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타난 木浦 4. 木浦府史 속의 木浦의 地名 由來 ㄱ) 樹木 운운한 것에 대하여 ㄴ) 木花 운운한 것에 대하여 ㄷ) 地形 운운한 것에 대하여 ㄹ) 地名 移動 운운한 것에 대하여 ㅁ) 南浦 운운한 것에 대하여 ㅂ) 덧붙이는 말. 5. 木浦의 地名과 關聯이 있는 몇 가지 資料 6. 木浦라 부르게 된 背景과 緣由 7. 글을 맺으며 오홍일(吳弘一) 목포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1932년생, 광주사범학교 졸업, 전남대 경제학과 졸업 고교교사 정년퇴임 논문부문 우수상(문화예술진흥원장상) 119 1. 글머리에 누구나 자기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고장의 歷史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은 人之常 情이 아닌가 한다. 필자도 그 방면의 전문 지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자신의 직업과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이 고장 목포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다. 그래서 新刊이든 古書든 또 그 밖의 자료든 이 고장과 관련이 있는 記錄物이면 낱장으로 된 地圖나 戶口單子 한 장에서부터 두툼한 서책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는 대 로 모아온 터이다. 그리고 시간을 만들어 이 고장과 관련이 있는 榮山江 流域을 비롯한 隣接 지역의 기관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현장을 踏査하기도 하면서 자료를 蒐集해왔다. 얼마 되지 않은 자료지만 직장에 在職 중에는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단 지 그때그때 읽고 메모를 남기면서 나름대로 涉獵해오는 데 그쳤다고 해야 옳을 것이 다. 그러다 보니 다른 지역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유독 木浦는 그 地名의 유래에 대 해 많은 간행물에서 논의되어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좀 중요하다고 생각되 는 몇몇을 그 刊行年度 순으로 들어보면, 『史蹟木浦』1) 『木浦府史』2) 『木浦史』3) 「내고장전통가꾸기」4) 『木浦鄕土誌 第1輯』5) 『地方行政地名史』6) 『木浦市史』7) 『木浦鄕土誌 第7輯』8) 『木浦市의 文化遺蹟』9) 등을 비롯하여, 필자가 입수한 것만 도 20에 가까운 간행물이 있다. 이 가운데서 日帝强占期인 1930년에 日人들이 펴낸 木浦府史는 현재 몇 卷밖에 남 1) 日帝 昭和 4年(서기 1929)에 당시의 木浦府에서 간행한 것을 2000년에 木浦文化院에서 原文과 飜譯文을 합본하여 간 행하였다. 2) 木浦府(昭和 5年= 1930). 『木浦府史』. 도쿄 三秀舍. 3) 朴魯贊(1974). 『木浦史』. 서울 文一出版社. 4) 내고장전통가꾸기 목포시편찬위원회 편(1981). 「내고장전통가꾸기」목포 동아인쇄소. 5) 木浦文化院(1985). 『木浦鄕土誌 第1輯 (歷史編)』. 木浦: 全一印刷所. 6) 내무부지방기획과(1982). 『地方行政地名史』. 서울 전광산업사. 7) 木浦市(1987). 『木浦市史(人文編)』. 圖書出版 鄕土文化社. 8) 木浦文化院(1991). 『木浦鄕土誌 第7輯 (歷史編Ⅱ)』. 도서출판 향토문화사. 9) 목포시(1995). 『木浦市의 文化遺蹟』. 광주: 도서출판 무돌. 120 아있지 않아서 일반인들은 1991년 그 複寫本이 나온 뒤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알게 되었고, 史蹟木浦는 1929년에 간행된 책인데도 최근인 2000년에 이르러서야 일반에게 알려진 책이다. 그래서 이런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던 몇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 민들은 그 책의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일반 시민들은 光復 후에 위에 든 간행물을 비롯한 여러 책에 소개된 목포 의 지명 유래 부분을 곧이곧대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1991년 목포부사의 복사본을 손에 넣기 전까지는 그때까지의 간행물에 실린 木浦의 지명 유래 부분에 대해 별 의문을 갖는 일 없이 으레 근거 있는 사실을 바탕 으로 記述한 것이겠거니 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木浦府史를 읽어보니 疑訝心이 생겼다. 日語로 된 목포부사의 목포의 지명 유래 부분과 광복 이후에 여러 간행물에서 云謂되고 있는 목포의 지명 유래 부분이 些少한 몇 가지 표현을 빼고는 그 要旨가 그렇게 똑 같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 음에는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양쪽을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광복 후에 나온 간행물의 기록 내용이 우리의 문헌 자료에서 그 근거를 찾아 쓰거나 옛적부터 口傳되어오는 내용을 直接 蒐集하여 記述한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하였다. 유의해서 살펴보니 그것은 간행 연도의 先後를 따져볼 때 木浦府史에 있는 내용을 그 出典을 밝히지 않은 채 그대로 번역 소개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앞선 번역의 잘 못을 그대로 踏襲한 것으로 보아 再引用한 것인 듯하기도 했다. 물론 목포부사에 그 런 기록이 있으니 그것을 그대로 번역하여 소개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재인용하는 과정이 이 책에서 저 책으로 거듭되다 보니 原義와 달라 진 내용으로 訛傳되고, 글쓴이에 따라서는 거기에다 자기 나름의 蛇足을 붙이고, 우리 의 여러 문헌까지 援用하여 擴大再生産시키다 보니 목포부사의 지명 유래 부분은 처 음의 간단했던 내용과는 달리 그럴싸하게 扮飾되어져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것처 럼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은 목포부사의 집필자가 臆測을 바탕으로 해서 일종의 試論 으로 提起한 내용까지도 變容되어져서 어느 새 사실을 기술한 것처럼 알려지게 되었 다는 것이다. 121 또 어떤 글은 그 내용의 眞實性마저 의심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목포의 지명 유래 로 목포부사에서 擧論한 것은 다섯 가지인데 그 가운데 두 가지 내용을, 그렇게 하는 근거나 그 밖의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任意로 하나로 合成하여 새로운 ‘說’까지 만 들어 내고, 한 발 더 나아가 이 새로운 ‘說’을 입증하려고 우리의 문헌 자료를 援用하 면서 納得하기 어려운 논리로 敷衍 說明까지 하고 있는 경우마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세히 비교 검토해 본 결과 이제까지 목포 지명의 유래를 다룬 간행물 가 운데 한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日人이 쓴 木浦府史의 내용이 그 출발점이고 거기 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0) 이러다 보니 일인들이 말한 내용이 그대로 알려지기도 하고, 屈折을 거쳐 알려지기 도 하고, 어떤 것은 그럴싸한 蛇足까지 덧붙여져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목포는 그 지명의 유래가 너무 여러 가지가 되어서 오히려 지명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혼란을 가져오게 하였다. 거기에다 목포부사에서 일인들이 말한 대로 開港以前의 목포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곳으로 誤認됨으로써 시민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목포의 역사는 開港 이후부터 시작되 었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까지 되었다. 이와 같은 견해는 公的인 간행물에마저 나타 나 목포는 마치 日人들에 의해서 開拓되고 발달한 도시인 것처럼 잘못 아는 사람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아주 사소한 일이고 일상생활에는 별 영향도 미치지 않는 작은 일로 생각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긴 眼目으로 볼 때 이 이상 목포시민의 自矜心을 隱然中에 損傷시키고, 결과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卑下하게 되는 일도 흔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日帝强占期 목포부사를 쓰면서 일인들이 은근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 고 파놓은 陷穽에 광복 후 반세기가 넘은 지금에 와서 우리 스스로가 不知不識間에 빠져 들어간 꼴이 되어버린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목포라는 지명의 기록을 더듬어, 언제부터 목포가 목포라 불리었으 10) 1930年에 木浦府史가 나오고, 광복 후 木浦(市)의 歷史를 다룬 책에서는 木浦史鑑(1955 梁世勳 編)등 한둘을 빼고는 어김없이 목포부사에 실린 木浦의 地名 由來의 내용과 같은 지명 유래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筆者가 接한, 지명 유 래를 다룬 19卷의 刊行物 中, 記名 또는 無記名으로 된 글 가운데 2篇을 除外하고는 木浦府史의 內容을 그대로 收 錄하거나 府史의 內容을 약간 添削하거나 그 내용을 부연 설명한 關聯이 있는 글들이었다. 122 며 목포가 우리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왔는가를 짚어 보고 싶었다. 아울러 필자가 보기에 아무래도 그 근거가 薄弱하고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이것 인지 저것인지 혼란을 가져오게 함으로써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否定的인 영향을 끼치 고 있는 木浦府史의 목포 지명 유래의 내용을 검토하여 그 所論의 當否를 하나하나 분명히 밝혀보고 싶기도 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할 수만 있다면 목포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 우리 視角에서 바 르게 살펴보고 싶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나름대로 考究해 보고, 쓰게 된 것이 이 글이다. 따라서 이 글에 서는 일인들이 쓴 목포부사에서 말하고 있는 목포의 지명 유래를 중심으로 그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아울러 위에 든 대로 우리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우리 시각에서 보는 목포의 지명 유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설사 그것이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완전하게까지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거 기에 접근해 가는 밑거름이 되고, 작은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이다. 2. 地名이란 어떤 것인가 그러면 그에 앞서 이 論議를 진행하는 데 참고가 되는 범위 내에서 지명이란 어떤 것인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地名은 烽燧山, 狎鷗亭, 牧場, 露積峰, 三鶴島, 夢灘 등과 같이 그 땅의 역사적 배경 이나 口傳說話와 연관이 있다든지, 지금처럼 큰 건물을 짓거나 토목공사를 하면서 뜻 있고 좋은 이름을 골라서 命名하는 경우는 대개 두세 音節의 한자어로 되어있다. 그러나 옛적부터 불리던 토박이말 지명은 그 땅의 位置나 地形 地勢에서 따거나, 그 近傍의 自然物의 形象, 自然地理的 與件 등을 따서 自然發生的으로 한 이름으로 부르다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널리 불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傳承되어 굳어진 것이다. 가령, 뒷개나 땅끝 뒤뜸 등은 그 位置에서 온 지명이고, 노리목 큰골 터진목 등은 123 그 지형‧지세에서 왔으며, 범바위 밤섬 용머리 등은 그 形象에서, 솔갯재 울돌목 다순 구미 등은 그 自然地理的 與件에서 온 것이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주어진 狀況에 따라 저마다의 땅은 제각기 고유의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러기에 지명에 쓰이는 特徵的인 말들은 島嶼와 陸地가 다르고, 高原과 平野가 서 로 區別되며, 海岸과 內陸이 같을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소박하고 누구나 금방 알 수 있는 말로 불려지던 토박이말 지명들은 漢字가 들어온 뒤에는 漢文을 아는 이에 의하여 音이나 뜻이 좋은 한자로 바뀌어 기 록에 남겨지고 한자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닭의 머리처럼 생겨서 ‘닭머리’로 불리다가 鷄頭가 되고, 뒷산에 차나 무가 많은 산자락 마을은 ‘차뫼’라 하다가 茶山으로 적고, 산이 시루떡 모양이어서 ‘시 루봉’이라 부르다가 甑峰으로 표기되었다. 柔順한 산세의 산기슭 마을은 伏龍이거나 臥龍이고, 골이 깊고 산세가 좋아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고장에서는 ‘맑은내’와 가까운 이름으로 불리다가 淸溪, 淸川, 淸水라 는 이름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강물이 굽이돌아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곳 은 어김없이 河回, 曲川, 曲江이 아니면 그와 비슷한 이름을 얻게 마련이다. 토박이말로 불리던 지명이 한자로 바뀌는 過程에서도 그 모양새는 여러 가지이다. 이를 크게 나누어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그 첫째는 토박이말 이름의 소리만을 取音해서 한자로 바꾸는 경우이다. 가령, 산의 모습이 함박을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함박산’으로 불리다가 音 그대 로 한자로 含朴山으로 적거나, ‘도롱골’을 都弄골로 적는 것은 이런 예이다. 둘째는 그 일부는 音만을 빌려오고 일부는 뜻을 한자로 바꾸는 경우이다. 예컨대 목포의 溫錦洞은 원래 그 곳의 지형이 U자 형으로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상당히 들어온 곳이고 自然的 與件이 南向인데다 儒達山을 뒤에 등지고 있어서 다른 곳과 달리 겨울에는 아주 다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다습다’의 사투리인 ‘다 숩다’의 冠形形인 ‘다순’에다 바닷가나 강가에 물이 땅 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곳을 이 르는 ‘구미’11)가 合成해서 토박이말 지명으로는 ‘다순구미’였던 것으로 口傳되어온다. 11) 남영신 엮음(1998). 「국어사전」. 서울 성안당. =만(灣) =후미 124 그런데 이 말이 사람에 따라 다순그미, 다순금, 따순그미, 따순기미, 따신기미12) 등 으로 불려온 것을 ‘다순+금’이라고 보아 뜻이 비슷한 따뜻할 溫+비단 錦의 溫錦洞이 라 한 것이라든지, 이웃 務安郡 夢灘面의 ‘사내’는 앞의 사는 音을 따온 모래 沙에 내 는 내 川 자를 써서 沙川리라고 한 것이나 ‘박실’을 朴谷이라 한자로 적은 것 등은 여 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뒤에 보겠지만 우리 목포의 지명도 이 경우에 들어가는 것이 라 본다. 셋째는 한자의 두 글자가 모두 토박이말과 뜻이 통하는 한자로 바뀐 경우이다. ‘갓바위’를 삿갓 笠 자 바위 岩 자 笠岩으로 한 것이나, ‘새터’는 新基로, ‘달바우=달 바위’는 月岩으로, ‘솔갯재’는 鳶峙로 고친 것 등이 이 範疇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글자가 없던 시기에 한자를 빌려서 적은, 三國史記에서와 같은 吏讀, 鄕 札式 表記 지명은 한자의 뜻만 보아서는 어디에서 緣由하는 지명인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한자로 쓰였지만 우리말 그대로를 한자의 音과 訓을 빌려 적은 것이기 때문이 다. 가까운 예로 우리 목포가 屬했던 務安郡은 三國時代에는 百濟에 속해 勿阿兮고을 (郡)이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하지만 勿阿兮郡이라는 한자만으로는 그 연유를 알 수가 없다.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당시의 우리말을 기록했으리라고 推定되는 ‘물 아래고을(郡)’이라 했을 때 비로소 ‘강의 河口인 물 아래에 있는 고을(郡)’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려니 하고 想定할 수 있는 것이다.13) 이와 같이 務安이 自然地理的 位置에서 따온 물아혜(물아래)郡이듯 靈巖郡은 달이 나오는 산 즉 月出山14)이 있는 郡이기에 옛날에는 月奈=달나郡이라 불린 것으로 보인 다. 또 羅州郡의 일부에 水川縣이 보이는데 이 곳은 달리 水入伊라고도 기록되어 있 다. 이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인 ‘물들이’이기에 그리 적은 것으로 考證한다. 이 같이 적던 지명을 지금과 같은 두 음절의 한자로 바꾼 嚆矢는 新羅 景德王 때이 다.15) 이로부터 지명을 두 음절이란 제한된 글자수로 적게 된 것이 똑 같은 지명이 12) 한글학회 편(1982). 「한국지명총람 14 (전남편)(Ⅱ)」. 149쪽. 13) 高麗歌謠 靑山別曲 제 3연 ‘믈아래’ 참조. 14) 月出山은 新羅 때는 달이 뜬다 즉 나온다 해서 月奈(달나)岳, 高麗 때는 月生山, 그리고 朝鮮時代에 와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는데 그 表記만 다를 뿐 ‘달이 나오는 산’이라는 뜻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다 하겠다. 그리고 하춘하가 부른 ‘영암 아리랑’은 月出山의 지명 유래를 머리에 두고 지은 歌詞가 아닌가 한다. 125 여럿 생기게 된 원인 중의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같은 지명이 전국에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목포에 있는 笠岩山은 長城郡에도 있다. 山亭이란 지명은 木浦, 一老邑, 羅州, 光州 에도 있다. 또 龍塘은 목포뿐만 아니라 바로 물 건너 靈巖郡 三湖面에도 있다. 韓國行 政區域便覽16)을 펼치면 똑 같은 지명이 여럿인 것을 알 수 있다. 전국 지도를 펼쳐 놓고 無作爲로 찾아보니 ‘월암리’만 여덟 군데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지금만 그런 것도 아니다. 韓國古地名辭典에는 같은 지명 두세 곳은 예사이 고, 江原道와 咸鏡道의 옛 이름은 다 같이 朔方道이며 玉山은 넷, 花山은 일곱 군데나 보인다.17) 이것은 사람의 이름에도 同名異人이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그러기에 목포라는 같은 지명이 榮山江 유역의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한편 옛날 官衙나 官職名도 본명과 별칭이 있고, 한 사람이 名, 字, 雅號에다 어떤 이는 諡號까지 있듯이 옛 地理志를 보면 一名, 或云, 又稱, 或稱…해 가며 지명에도 여러 별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토박이말 지명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도 원래의 이름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바뀌어 버리는 경우도 보인다. 이것은 위에서 본 토박이말에서 取音해서 한자로 바꾸 는 경우가 대개 그렇다. 朝鮮時代의 務安縣地圖에는 務安邑에서 목포로 오는 도로의 지금의 淸溪面과 夢灘 面 경계에 ‘구리치’라는 고개가 있다. 토박이말로는 지금도 ‘꾸릿재’라고 하는데, 옛날 가정에서 옷베를 짤 때 씨실이 되는 꾸리의 실처럼 긴 고개여서 그리 불린다고 口傳 되는 고개이다. 그런데 기록에는 문헌에 따라 꾸릿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음만 비 슷한 九里峙 또는 鳩里峙가 아니면, 뜻을 빌려온 銅峙로까지 쓰여있는 데도 있었다. 뒤에 보겠지만 우리 목포의 지명도 토박이말에서 한자로 바뀌면서 九里峙와 같이 일 부는 音을 일부는 訓을 따온 것이라 하겠다. 지명이 그 곳의 자연물을 따라 불려졌을 때 그것이 普遍化해지면 그 자연물 하나만 15) 新羅 35代 景德王 16년 丁酉 서기 757년 12월에 全國에 9州를 두고 郡‧縣의 名稱을 두 音節의 漢文式으로 고쳤다. 16) 廣東書舘編輯部(1979). 『’79韓國行政區域便覽』.서울 廣東書舘. 木浦市(1991). 『木浦市史(補整編Ⅰ)』. 圖書出版 鄕土文化社. 74∼6. 17) 田溶新 編(1993). 『民族文化硏究叢書 66 韓國古地名辭典』. 서울 高大民族文化硏究所 出版部. 126 을 指稱하기도 하지만 그 近傍을 包括的으로 드러내는 이름이 되는 것이 예사이다. 그런 예가 가까운 ‘갓바위’의 경우이다. 바위의 생김새가 갓을 쓴 道士의 모습과 닮았 다하여 그 形象에서 유래한 바위이름 하나가 그 곳의 지명이 되고 그 包括하는 범위 가 차츰 擴大되어 이제는 그 근방을 널리 이르는 땅이름이 되어버렸고 한자로는 笠岩 이라 한다. 그리고 그 옆으로 이어진 산 이름까지도 笠岩山이라 부른다. 지명은 이와 같이 그 境域을 넓혀가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웃에 그 일부가 倂合되어 좁아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 예가 이웃 三鄕面이나 지금은 목포가 되어버 려 없어진 二老面이다. 그리고 지명은 토박이말 이름은 알 수 없거나 희미해지고 한자명이 완전히 지배하 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都市化한 곳에서 많다. 우리 목포의 현재 지명도 그런 경우 라 하겠다. 또 토박이말 이름과 한자명이 같은 세력으로 쓰이기도 한다. 문서에 기록하는 이름 은 한자명이지만 日常生活에서는 늘 토박이말 이름을 쓰는 경우이다. 농촌의 오래된 전통적인 마을 이름이 대개 그렇다. 반대로 토박이말 이름을 固守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후미지고 규모가 작은 自然 部落에 그런 경우가 간혹 있다. 우리 가까이에도 道廳 移轉工事가 한창인 南岳 新都 市 豫定地에서 동북쪽에 있는 一老邑 쪽으로 가다 보면 현재 12가구가 살고 있는 ‘노 리목’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한자로는 獐項村이라 한다. 노루의 사투리인 노리의 목처 럼 길고 가늘게 생긴, 지금은 農耕地가 된, 옛 바다 지형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 다. 그런데 지금도 그 마을에 사는 이들이나 근방 사람들은 한자 지명으로 부르는 일 이 없다고 한다. 國立地理院에서 발행한 5만분의 1지도에도 ‘獐項村’이나 ‘노루목’이 아 닌 ‘노리목’으로 표기되어있다. 다만 지금의 務安郡 三鄕面이 羅州牧의 越境地로 있던 朝鮮時代의 羅州牧輿地勝覽에는 獐項村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느 지명이든 옛날 邑治였던 곳이나 근래에 생긴 도시나 모를까 그 지명의 緣由와 來歷을 명확하게 정리해서 기록해 놓은 경우는 드물다. 오랜 세월 口碑傳承되어 오던 것을 어느 시기 기록에 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발음이나 뜻이 주민들의 情緖에 反하는 경우는 부르기도 쉽고 뜻도 좋은 이 름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런 구체적인 예를 요즈음, 옛 이름이 아닌 새 이름으 127 로, 큰길가의 동네 어귀에 세워놓은 마을 標識에서 볼 수 있었다. 한때 목포도 靑湖로 고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이가 중심이 되어 詩人의 詩語에서 빌려와 그렇게 부르자고 한 것으로 들었는데 널리 呼應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지명은 그 뜻이 아무리 좋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合一된 共感帶가 이루어져야지 그렇지 않고는 몇 사람에 의해 함부로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 다. 지명은 그 고장 주민들의 共有 資産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면 羅州와 목포 周邊의 지명이 이제까지 기록상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적어보 고자 한다. 먼저 나주쪽에서부터 보면, 羅州는 發羅, 通義, 錦山, 錦城, 鎭海軍(이상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羅州에서 시작해서 河口까지의 지금의 榮山江은 南浦津(세종실록지리지), 廣 灘, 錦川, 錦江, 錦江津, 南浦, 木浦, 羅州木浦,(이상 신증동국여지승람), 錦水, 榮江, 沙 湖江, 曲江, 夢灘江(이상 조선후기의 제 기록) 등으로 나온다. 영산강의 이러한 名稱은 지금처럼 榮山江 전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嚴密하지는 않지만 한 구간 또는 流域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이기도 하고 한 地域을 말하기도 했다. 또 같은 시기에 사용된 호칭도 있지만 시기를 달리하는 것도 있다. 대략 羅州 가까이에서는 錦 자가 들어가는 이름으로 불렸고, 나주에서 지금의 文平川(多侍川)18) 근방까지는 南浦로, 그 하류 咸平川에서 駐龍浦 근방까지는 沙湖江 曲江 夢灘江으로, 그리고 주룡포 이남은 木浦라 불린 것으로 보인다. 榮山浦 근방에서는 錦川, 錦水, 錦江津, 南浦, 木浦, 羅州木浦 등으로 나타난다. 나주 주변의 지명에는 유난히 ‘비단 羅’나 ‘비단 錦’ 자가 많이 들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목포는 口傳으로는 목개, 목개진 기록으로는 木浦, 木浦營, 木浦鎭, 木浦 萬戶鎭 등으로 쓰이고 있다. 18) 國立地理院의 5만 분의 1 地圖에는 文平川으로 되어있으나 現地에서는 上流 쪽인 文平面에서는 文平川이라 하고 白 龍堤를 境界로 下流 쪽인 多侍面에서는 多侍川이라고 한다. 128 아무튼 나주가 羅나 錦처럼 비단과 관계되는 지명이 많듯이 목포는 ‘목’의 음과 관계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3. 옛 文獻에 나타난 木浦의 地名과 그 由來 위에서는 우리의 지명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우리 문헌 기록에 나타난 목포라는 지명을 알아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유래했는가를 考究해 보고자 한다. 그러면 木浦라는 지명은 언제부터 文獻 記錄에 나타났을까. 그 나타난 年代順에 따 라 살펴보자. ㄱ) 朝鮮王朝實錄에 나타난 목포 1). 三國史記의 本紀, 列傳, 地理志 등에는 목포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19) 木浦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기록에 보이는 것은 朝鮮王朝實錄 太祖 6年(서기 1397) 條에서가 아닌가 한다. ‘各道의 兵馬都節制使를 없애고 各鎭에 僉節制使를 두어 부근 州의 군사를 거느려 守禦에 대비하였다.……전라도의 네 鎭은 木浦 兆陽 沃溝 興德이 다.’라는 대목에서이다.20)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네 鎭 중 다른 세 곳의 위치는 현재 알려져 있지만 목포만은 어디라고 확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兵馬라 한 것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를 살필 때 그 당시 나주에 있던 木浦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文獻上에 羅州에 있는 木浦라는 지명이 보이는 嚆矢일 것이다. 19) 『高麗史』는 단종 2년(1454)에 완성된 世宗實錄地理志와 거의 같은 시기인 문종 1년(1451)에야 撰述된 것이기 때 문에 高麗史에 木浦라는 지명이 보인다고 해서 高麗時代부터 목포가 記錄에 나타났다는 擧證資料는 되지 못할 것 이므로 여기서는 論外로 한다. 20) 罷各道兵馬都節制使 置各鎭僉節制使 率所屬附近州兵馬以備守禦……全羅道 四鎭 木浦 兆陽 沃溝 興 德….太祖實錄 6年(1397) 5월 21일(壬申) 條. -太祖實錄 卷第十一, 十五 後面. 129 2). 다음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朝鮮王朝實錄 太宗 7年(서기 1407) 8월 25일(丙午) 條에 ‘倭賊이 庇仁縣(현 충남 서천군 비인면-필자 주)에 侵寇하였다. 또 목포에도 침 입하여 私船 한 척을 빼앗고 다섯 사람을 죽였으며 다섯 사람이 사로잡혀 갔다’.21)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의 목포는 倭寇가 內陸이 아닌 海岸地方에 侵寇하였을 것이니 나 주의 목포가 아니라 지금의 목포임이 틀림없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것은 文獻에 나타난 지금의 木浦의 최초의 기록이 아닌가 한다. 3). 그 다음이 朝鮮王朝實錄 世宗 14年(서기 1432) 條에서이다. 이 해 8월 5일(辛卯) 에, 前에 都萬戶를 지내고 前 摠制이기도 했던 李恪이 全羅處置使營의 木浦萬戶는 마 땅히 浦口에 있으면서 지켜야함에도 바다에서 너무 깊숙한 大堀浦에 들어와 있음을 걱정하고, 전라도내에서 兵船을 배치할 要衝地를 설명하는 가운데 나오는 木浦가 있 다.22) 그리고 그 해 9월 대굴포에 있는 水軍處置使營을 옮겨 배치할 곳을 살피도록 全羅道에 都巡察使로 보내졌던 鄭欽之가 10월 20일(乙巳) 그 결과를 아뢴 데서 나오 는 목포가 있는데 여기에서의 목포도 모두 지금의 목포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23) 4). 木浦에 관해 가장 確實하게 지금의 木浦와 그 당시 羅州에 있었던 木浦인 羅州 木浦를 구별할 수 있도록 敍述하여 놓은 것은 世宗實錄地理志 全羅道條―이하 世宗地 理志라 약칭―에서이다.24) ⑴ 그 첫번째는 영산강의 세 源流인 潭陽의 秋月山, 長城의 葦嶺, 綾城의 雙峯의 흐 름을 밝히고 이 세 줄기 물이 나주에서 합해져 서쪽으로 흘러 ‘南浦津이 되고… 務安 21) 丙午 倭寇庇仁縣 又侵木浦 奪私船一艘 殺五人 虜五人以去. -太宗實錄 卷第十四, 十八 前面. 22) …然全羅處置之營木浦萬戶 守在浦口而深入大堀浦 距海幾二息 在平時出入尙且再經潮汐 不幸遭風則 未能一二日達于 海…臣嘗受其道都萬戶之任 粗知海道之事 又受兵馬節制之任 且知陸守之方 若多慶浦未訖浦木浦周伊浦等處 道內要衝 水勢亦順 戰艦出入便易 可謂乘機應敵之所 願遣朝臣 審其便否擇守要害…세종실록 14년(1432) 8월 5일(신묘)-世宗實 錄 卷第 五十七, 十七後面∼十八前面. 23)……遣都巡察使鄭欽之于全羅道 看審大堀水營移排之所. 世宗實錄 14年(1432) 9月 9日(甲子)-世宗實錄 卷第五十七, 三 十一後面. 乙巳……全羅道都巡察使 鄭欽之啓 本道水營移排于木浦 木浦兵船移泊于黃原南面周梁…同年 10月 20日(乙巳)-世宗實 錄 卷第五十八, 七前後面. 24) 世宗莊憲大王實錄 卷第一百五十一 地理志 全羅道 條. 130 縣 동쪽에서 大堀浦가 되며 다시 서쪽으로 흘러서 靈巖郡의 雲積山 기슭을 지나 木浦 가 되어 바다로 들어가며 下道의 漕運이 여기를 거쳐서 서울에 이른다.…’25)라고 한 데서이다. 여기에 나오는 목포는 분명히 지금의 목포이다. 그것은 雲積山이 지금의 영암군 鶴 山面과 西湖面의 境界를 이루는 下隱跡山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26) ⑵ 두번째는 당시 全羅道의 두 漕倉인 咸悅縣 서쪽 皮浦에 있던 德成倉과 더불어 그 하나인 榮山倉이 羅州木浦에 있다고 한 대목에서이다. 여기서는 목포가 아니라 羅 州木浦라 표기했고 영산창이라 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목포가 아닌 나주에 있는 목포 인 것이 분명하다.27) 더욱이 영산창에서는 全羅 下道 스물 일곱 고을의 조세를 받아 들인 곳으로 되어 있으니 倭寇의 侵奪을 경계해야 했던 당시를 감안해 보더라도 지금 의 목포일 수는 없다. ⑶ 세번째는 水軍과 관계된 곳을 敍述한 대목에서이다. 당시 全羅道의 水軍 編制는 務安縣 大堀浦28)에 있던 水軍處置使 밑에 左道와 右道의 두 都萬戶가 있고, 각 도만 호 아래 萬戶가 있었다. 木浦萬戶는 咸平縣 서쪽의 垣串에 있던 右道都萬戶 麾下의 다섯 萬戶 중의 하나로 務安縣 남쪽의 목포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29) 따라서 이 목포는 목포에 萬戶를 差遣한 뒤의 목포이기도 하니 지금의 목포임을 알 수 있다.30) ⑷ 네 번째는 務安縣 關防 條에 나오는 목포이다. 무안에서 多慶浦와 더불어 兵船 25) …爲南浦津…至務安縣東 爲大堀浦 又西流 過靈岩郡雲積山之麓 爲木浦 入于海 下道漕運由此達于京…. 위에 든 세종 실록지리지 참조. 26) 다른 文獻에 銀寂산(대동여지지. 영암읍지), 銀積산(청구도)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는 지금의 隱跡산이다. 왜냐 하면 나주에서 榮山江의 흐름을 따라 내려오면 나주 錦城山 이남에서 비록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발음이 비슷하면서 영 암 쪽에 있는 산다운 산은 이 산밖에 없기 때문이다. 27) …漕倉二 榮山倉在羅州木浦……租稅納于此, 德成倉在咸悅縣西皮浦……租稅納于此. 위에 든 세종실록지리지 참조. 2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 36 무안현 山川條에 대굴포를 ‘在縣東二十里羅州錦江之下流’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는 무안현에 속했던 지금의 咸平郡 鶴橋面 谷倉里 大谷部落 앞으로 考證한다.-함평군사편찬위원회 편(1999). 『咸平郡 史』.643∼6쪽. 29) …水軍處置使營 在務安縣大堀浦……右道都萬戶 船泊處 在咸平縣西垣串……掌內 萬戶五 木浦 在務安縣南… 위에 든 세종실록지리지 참조. 30) 世宗實錄에 木浦萬戶 差遣을 결정한 일자는 세종 21년(1439) 4월 15일(임진)이다. 131 이 머무는 곳인 木浦라 했으니 위에 나온 지금의 목포를 지칭하는 것이다.31) 따라서 위에서 세 번 언급된 목포와 한 번 나온 나주목포는 世宗地理志가 간행된 15세기 中葉 이전에 목포는 軍船이 碇泊하고 바다를 防禦하는 要衝이었던데 반해 나 주목포에는 영산창이 있어서 稅穀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즉 그 위치가 확연히 달랐으 며 거기에서 행해지던 역할이나 성격도 전혀 相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表記도 木浦와 羅州木浦로 구별해서 적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근래에 와서 木浦라는 語彙에 사로잡혀서 木浦와 羅州木浦를 구별하지 못하고 해석에 혼동을 가져오는 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목포는 지금의 목포이고 나주목포는 나주에 있었던 목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옳다. 옛 문헌에서의 이러한 表記上의 구별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지금의 全北 群山은 그 냥 群山이라 적고, 烽燧가 있었고 羅州牧의 越境地였던 지금의 務安郡 三鄕面의 群山 은 羅州群山이라고 구별해서 표기한 데서도 볼 수 있다. ㄴ)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타난 木浦 다음은 新增東國輿地勝覽―이하 新輿覽이라 약칭―을 중심으로 高麗史와 高麗史節 要에 나오는 목포와 함께 알아보기로 한다. 1) 먼저 羅州 쪽인 新輿覽의 羅州牧 조에서 보면 ⑴ 新輿覽 卷 35 羅州牧 佛宇 條의 興龍寺 緣起說話에, 太祖 王建과 莊和王后가 結 緣하게 되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목포가 있다. 이 이야기는 책이 쓰여지기 500여 년 전의 사실을 記述한 것이다. 같은 이야기는 高麗史에도 보이는데 이 목포는 ‘흥룡사는 금강진의 북쪽에 있다. 고려 태조 장화왕후 오씨의 조부는 부돈이요, 아버지는 다련군 인데 대대로 주의 목포에 살고 있었다.……얼마 안 되어 태조가 수군장군으로 나주에 出鎭하여, 木浦에 배를 정박시키고 물가 위를 바라보니 오색의 구름이 서려 있으므로 31) …關防 大堀浦 水軍處置使 兵船泊立 多慶浦‧木浦 兵船泊立….위에 든 세종실록지리지 참조. 132 태조가 그리로 가보니 장화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라는 설화의 배경이나 내용 으로 보아 지금의 木浦가 아닌 나주에 있었던 羅州木浦이다.32) ⑵ 다음은 신여람의 권 35 나주목 산천 조에서 ‘錦江津은 일명 목포라 한다’ 했다. 여기에서의 목포도 금강진이 나주의 남쪽 11리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목포가 아닌 나주목포임이 분명하다.33) ⑶ 다음은 신여람 권 36 남평현 산천조의 城灘의 설명에서 나오는 나주목포가 있 다.34) 이상 나주 쪽에 세 번 보이는 목포 또는 나주목포는 지금의 목포와 混同이 될 수가 없다. 글자는 목포와 똑 같지만 나주 쪽의 지명을 말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 다. 그리고 나주목 조의 興龍寺, 錦江津,35) 松只川,36) 亭子川,37) 그리고 南平縣의 城灘38) 의 설명을 종합해 볼 때 신여람에서는 나주근방의 지금의 영산강을 위치에 따라 또는 별칭으로 廣灘, 錦江津, 錦川, 南浦, 木浦, 羅州木浦… 등으로도 불렀고, 江의 名稱으로 뿐만이 아니라 나루 내지 浦口의 이름으로도 넘나들어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즉 木浦라고 할 때 그것은 목포 앞 바다를 指 稱하기도 하고 육지인 埠頭를 말하기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32) 興龍寺 在錦江津北 高麗太祖莊和王后吳氏 祖富伅 父多憐君 世家州之木浦……未幾太祖以水軍將軍 出鎭羅州 泊舟木 浦 望見洲上 有五色雲氣 至則后浣布……新輿覽 卷三十五 羅州牧 佛宇條. 33) 錦江津一名錦川一名木浦或云南浦卽廣灘下流在州南十一里…新輿覽 卷三十五 羅州牧 山川條. 34) 城灘 在縣北三里 源出綾城和順二縣 西流經縣北入羅州木浦. -新輿覽 卷第三十六 南平縣 山川條. 35) 금강진은 일명 금천, 목포 혹은 남포라고도 한다. 즉 광탄의 하류인데 주의 남쪽 11리에 있다. 36) 송지천은 주의 남쪽 15리에 있다. 쌍계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남포로 들어간다(松只川 在州南15里 出雙溪山 北 流 入南浦). 37) 정자천은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금성산의 서쪽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남포로 들어간다(亭子川 在州西25里 出錦 城山之西 南流 入南浦) 38) 성탄은 현의 북 3리에 있다. 그 근원은 능성‧화순 두 현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현의 북쪽을 지나 나주목포로 들 어간다. 133 2) 다음은 木浦 쪽을 보기로 한다. 新輿覽 卷 36 務安縣 關防 木浦營 條에 나오는 목포는 空間的으로는 같은 목포지 만, 時間的으로는 책이 씌어지기 500여 년 전의 이야기와 당시의 사실을 적은 두 부 분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하리라고 본다. ⑴ 먼저, 기록 당시로부터 500여 년 전인 高麗 太祖 王建과 莊和王后의 結緣 이야 기와 같은 시기의 사실인, 王建과 甄萱이 羅州地方을 爭覇하기 위한 海戰에서 군사를 布陣하는 데서 나오는 목포이다. 高麗史節要에는 앞부분의 敍述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39) 하지만 高麗史에서는 앞뒷 일을 더 자세히 기록하고 글자의 添削이 있기는 해도 新輿覽과 거의 동일한 내용의 기록이니 모두를 인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여람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궁예 때에 고려 태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 포구에 이르렀다. 후백제의 견훤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함을 벌여놓았는데 목포에서 영암군 덕진포까지 뱃머리와 고물 이 서로 잇닿았으며 수‧륙의 군사가 서로 호응 합세하여 그 軍勢가 자못 강성하였으 므로 여러 장수들이 이를 근심하였다…’했다.40) 여기에 나오는 목포는 영산강을 사이하고 靈巖 德津浦와 마주한 곳인 지금의 목포 라고 해야 옳다. 왜냐하면 만약 이 목포를, 近間에 간혹 提起하는 이가 있는 것처럼 나주에 있는 목포나 영산강 上流의, 所在도 確定짓지 않는 어느 깊숙한 곳에 있는 목 포라고 한다면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理致에 어긋난다. 첫째, ‘高麗 太祖가 군사를 거느리고 羅州 浦口에 이르렀다’라는 기록만으로 본다면 王建이 진을 친 곳은 나주 포구이다. 그런데 羅州에서 德津浦까지의 거리와 木浦에서 德津浦까지의 거리를 비교해 보거나, 지도를 놓고 羅州에서 木浦까지의 榮山江 물줄 기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의 지리적 상황을 알아보고 영산강이 河口둑으로 막히기 전에 영산강 상류인 나주와 하류인 목포와의 바닷물이 들고 써는 시간의 차이관계 등 39) 高麗史와 신여람에서 ‘…나주포구에 이르렀다…(至羅州浦口)’라고 한 데를 高麗史節要에서는 ‘…덕진포로 나아가 자…(進次德眞浦)로 되어 있으나 견훤이 진을 친 곳의 기록에는 차이가 없고 본 논의를 진행하는데는 高麗史節要의 기록이 오히려 사정을 더 명확하게 해준다. 40) …○弓裔時 高麗太祖 領兵 至羅州浦口 後百濟 甄萱 親率兵 列戰艦自木浦至靈巖郡德津浦 首尾相銜 水陸縱橫 兵勢甚 盛 諸將患之…… 신여람 권 36 무안현 관방 목포영 조. 134 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견해이며 그 대답은 자명해진다. 왜냐하면 敵將 王建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포구에 버티고 있는데 아무리 강한 군 사와 많은 戰艦을 이끌었다 해도, 敵將의 코앞인 나주 포구에서부터 굽이도는 영산강 물줄기를 따라 장장 靈巖 德津浦까지 군사를 分散 配置할 어리석은 甄萱은 아닐 것이 기 때문이다. 또 이것을 高麗史節要의 기록을 바탕으로 ‘덕진포로 나아가자’를 王建이 나주 쪽에 서 덕진포 쪽으로 進擊을 했거나, 아니면 그 당시의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한 狀況으 로 보아 가장 可能性이 있는, 王建이 羅州 쪽에 있지 않고 反對로 남서 바다 쪽인 珍 島郡과 皐夷島城을 陷落시킨 뒤, 남쪽인 榮山江 河口 쪽에서 덕진포 쪽으로 北上해 나아갔다고 할 경우 甄萱이 나주목포에서 덕진포까지 軍船을 분산 배치하는 어리석은 布陣은 생각할 수도 없으므로 狀況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로 보아 甄萱이 軍船을 배치한 것은 지금의 목포와 덕진포 사이인 것이다. 그리 고 이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41) 둘째, 新輿覽 卷 36 務安縣 關防 木浦營 條의 『木浦營 在縣南68里 羅州木浦 至此 入海 故通稱木浦…高麗太祖領兵至羅州浦口 後百濟甄萱親率兵列戰艦自木浦至靈巖德津 浦…』중 글자를 굵게 하고 밑줄 친 부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목포가 나주에 있는 목 포라면 후자의 목포도 羅州木浦라고 하나로 통일해서 적지 구태여 木浦로 구별해서 적었을 理가 없을 것이다. 셋째, 왕건과 견훤의 싸움이 지금의 목포와는 관계도 없는, 나주에 있는 목포와 영 암 덕진포 사이에서 일어난 싸움이었다면 앞에서 본 장화왕후의 說話처럼 신여람의 41) 三國史記 권 제12 新羅本紀 효공왕 13, 14년 조와 동 권 제50 列傳 甄萱 조에 따르면, 왕건과 견훤이 나주와 목포 및 그 서남 해역에서 싸운 것은 여러 차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列傳의 ‘건화 2년에 견훤은 궁예와 덕진포 에서 싸웠다(乾化2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한 것으로 보아 목포 덕진포간 해전은 서기 912년에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헌데 이병도 선생의 震檀學會 韓國史 ② 中世篇(을유문화사 간 1961) 26쪽과 27쪽 사이에 있는 後三國圖에는 목포 가 현재의 목포의 위치에 표시되어 있어 이 박사가 보는 후삼국 시대의 목포의 위치와 목포라 불린 시기를 알게 하 고 아울러 덕진포 海戰의 場所도 斟酌하게 한다. 그리고 文秀鎭의 ‘高麗 建國期의 羅州 勢力’이란 글 중 ‘Ⅲ 王建의 羅州 經略’(牧鄕- 羅州牧鄕土文化硏究會 刊, 1990, 52~60쪽)에 그 間의 事情이 詳述되어있다. 아울러 김상기 박사의 신편 고려시대사(서울대학교출판부 간, 1985, 21쪽)도 참고가 된다. 135 羅州牧 조에 적을 일이지 귀꿈스럽게 하필 務安縣 木浦營 條에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 이다. 신여람의 기록에는 어디에도 관계도 없는 타 지역의 사실을 끌어다 기록해 놓 은 데는 없다. 따라서 고려 태조 王建과 甄萱의 해전에서 견훤이 軍船을 벌여놓은 목포에서 영암 덕진포까지의 목포는 異論의 餘地없이 지금의 목포인 것이다. 왜 이와 같이 장황하게 목포와 나주목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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